배우 한정원 농구선수 김승현 이혼 이유 새로운 열애소식과 임신 고백 축하합니다 프로필 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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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원이 이혼 2년 만에 열애 소식과 2세 소식을 함께 전했다.

한정원은 5일 자신의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태아 사진을 공유했다.

한정원은 "황금 똥과 반짝이는 똥꿈이 뚜렷하기만 하다. 로또를 산다고 달려 나갔는데 로또보다 더 행운인 금동이가 저에게 찾아왔다"며 "내가 엄마라니,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다. 내 나이가 노산이라고 해서 안정기인 12주가 지나고 나서야 조심스레 공개한다"고 밝혔다.

이어 "아직은 잘 모르는 게 너무 많아서 하나하나 천천히 배워가는 중이다. 더 잘살고 싶은 용기가 어마어마하게 생겼다"고 말했다.

김승현 프로필

김승현

金勝鉉

출생

1978년 11월 23일 (44세)

인천광역시 부평구

국적

대한민국 국기

대한민국

학력

인천산곡북초 - 송도중 - 송도고 - 동국대

신체

175cm[1], 77kg

포지션

포인트 가드

프로 입단

2001년 드래프트 1라운드 (전체 3순위, 대구 동양)

소속팀

대구 동양/오리온스 (2001~2010)

서울 삼성 썬더스 (2011~2014)

등번호

3번, 15번[2]

국가대표

아시안게임 2회(2002,2006)

FIBA 아시아선수권 3회(2003~2007)

충격과 공포의 신인 시절 김승현

2001년 드래프트 당시, 김승현과 같은 단신가드가 KBL에서 통할 것이냐라는 혹평이 있었다. 당시 오리온스보다 지명권이 바로 위에 있었던 코리아텐더가 슈팅 가드 전형수를 지명했었는데, 결과적으로 김승현이라는 최고의 포인트 가드를 거른 셈이라 결과적으로 대차게 까이고 말았다.[5] 전희철은 시즌 전 김승현의 플레이를 보고 어머니에게 "엄마, 우리 팀에 농구 끝내주게 잘하는 애 왔어." 라고 말했다고 한다. 당시 전희철의 어머니는 '쟤가 다른 선수 이야기 하면서 저렇게 신이 난 적이 없는데… (얼마나 잘 하길래)' 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1998-99 시즌 전설적인 32연패를 기록하고, 수 년 동안 쭉 하위권에 처져 있었던 오리온스는 2001년 김승현의 등장과 함께 완전히 뒤바뀌었다. 김승현을 중심으로 한 런앤건 농구로 오리온스는 순식간에 KBL의 강호이자 전국구 인기 구단으로 올라섰다. 2001~02 시즌 김승현은 데뷔전에서 15득점 10어시스트, 두번째 경기에서는 19점 10어시스트를 기록하는 등 탈 신인급의 활약을 했고, 결국 만년 꼴찌 동양을 36승 18패 정규시즌 1위팀으로 만들었다. 시즌 평균 기록은 12.2득점 8어시스트 3.2스틸.

2002 부산 아시안 게임에 국가대표로 출전했다. 결승전에서 5년동안 이겨본 적이 없던 중국을 만나, 패색이 짙던 경기 종료 막판 결정적인 스틸에 이은 득점 등으로 경기를 연장전으로 끌고 갔고, 연장전 대역전극을 지휘하여 금메달 획득에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당연히 MVP에 등극했으며, 병역 특례도 받았다.[12]

이 모든 게 프로 데뷔 후 1년 만에 벌어진 일이며, 김승현은 이 짧은 기간에 농구 선수로서 이룰 것은 다 이루게 되었다. 아직까지도 이 당시 김승현을 능가하는 임팩트를 보여 준 선수는 찾아볼 수 없다.[13]

김승현의 합류 이후, KBL 최약체 구단이었던 오리온스는 순식간에 리그의 강호이자 인기 구단으로 변모하였다. 외국인 선수들과의 호흡도 좋아서 마르커스 힉스, 바비 레이저, 네이트 존슨, 아이라 클라크, 리 벤슨, 피트 마이클 등 전성기 오리온스 외국인 선수들의 성공을 받쳐주었다. 2002~03 시즌 또한 좋은 모습을 보여주며 2년 연속 정규리그 우승을 기록했다. 하지만 챔피언 결정전에서는 당시 노장이었던 허재와 신인 김주성을 필두로 한 원주 TG 엑써스의 벽에 가로막혀 준우승했다.

2003~04 시즌 무렵부터 NBA 팀들이 신분 조회를 요청했다고 한다. 실제로 2팀에서 요청이 왔고, 2004~05 시즌 이후 여름에 당시 하승진이 뛰고 있던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로 날아갔다. 서머리그[14]에 참가하기 위한 목적으로 포틀랜드의 서머리그 캠프에서 하승진과 같이 훈련했다고 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서머리그 로스터에 들지 못하면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김승현 본인의 말로는 감독이 경질되면서 입단 테스트가 흐지부지 되었다고 밝혔다.[15][16]

2006~07 시즌까지 매번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2002~03 시즌 이후 팀 성적은 계속 떨어지는 모습이었다. 정규리그 우승과, 챔피언 결정전 우승은커녕 챔피언 결정전 진출도 한 번도 없었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래도 김승현은 꾸준한 개인기록과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하지만 2007~08 시즌부터 허리 부상을 겪으며 크게 부진하기 시작했다.

김승현이 몰락하면서 오리온스도 같이 나락으로 빠지기 시작했다.[17]

2007~08 시즌에는 부상으로 프로 입단 후 처음으로 플레이오프 탈락 및 최하위를 경험했고, 개인과 팀 모두 내리막길을 겪게 된다. 2009~10 시즌까지 차례대로 10위, 9위, 10위라는 팀 성적을 기록했고, 김승현 또한 부상과 더불어 이면계약서[18] 논란이라는 파문으로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결국 KBL로부터 임의 탈퇴라는 사실상 무기한 선수자격 정지 처분을 받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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