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 밤바다는 봄이 살랑거리는 이맘때 더 주목받는다.
여행객이 여수 돌산읍 큰끝등대에서 가족사진을 찍고 있다. 큰끝등대는 지역에서도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숨겨진 '인스타 명소'다.
거북선대교, 돌산대교에 해상케이블카와 ‘낭만포차’까지 경관조명이 어우러진 여수의 밤은 낮과는 다른 들뜬 분위기를 자아낸다. 여행은 숙제가 아니다. 유명 관광지에서 인증사진을 포기할 수 없지만 여행의 진짜 목적은 조금은 한적한 곳에서 나만의 여유를 즐기는 것이다.
돌산도는 목적지까지 이르는 과정이 더 알찬 곳이다. 여수 시내를 벗어나 돌산도로 들어선 여행객의 십중팔구는 섬 끝의 향일암으로 내달린다. 아담한 숲과 해변, 삶의 향기 짭조름한 포구와 정겨운 마을을 스쳐간다. 돌산도 동쪽 해변을 따라 연결된 해안도로로 천천히 차를 몰았다.
바닷가 언덕 위에 전망 좋은 용월사
돌산도에 접어들어 17번 국도를 따라 조금 내려가다 좌측으로 상동·하동마을 표지판이 보인다. 좁은 길을 따라 언덕을 넘으면 섬이라고 실감하지 못할 정도로 낮은 산으로 둘러싸인 펑퍼짐한 구릉에 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아담한 갯가에서 마을이 끝나고 길은 다시 산자락으로 이어진다.
낮은 고갯마루를 넘으면 매끈한 불상 하나가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관음성지라 자랑하는 용월사다. 중생의 고통에 귀 기울이는 관세음보살이 산다는 산, 인도 남해안의 보타락 정토를 모델로 세웠다는 절이다.
불자라면 응당 법당에 모신 불상에 먼저 합장하겠지만, 여행객은 자연스럽게 절 마당에 세워진 해수관음상 앞으로 발길을 내딛는다. 남해와 여수 사이 넓고 푸른 바다가 시원하게 조망되는 곳이다.
화사하게 망울을 터트린 벚나무 가지 사이로 봄 바다가 출렁거리고, 수면에는 여수산단으로 향하는 대형 화물선이 종이배처럼 둥둥 떠 있다.
돌산읍 해변가 바위 절벽에 세워진 용월사.
돌산읍 용월사 앞마당의 벚꽃 가지 뒤로 여수만 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용월사는 마을에서 한참 떨어진 해안 절벽에 숨은 듯 자리 잡고 있다.
용왕전으로 이어지는 108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빨갛게 물든 동백꽃이 송이째 뚝뚝 떨어져 있고, 바로 옆에 또 전망대가 설치돼 있다. 한 층 내려온 정도인데 바닷물은 더 푸르고 파도 소리는 한층 가깝다.
사찰은 20m 해안 절벽에 세워져 있다. 암벽을 활용한 용왕전 창문에도 그림 같은 풍경이 담기니 시선이 불상보다 바다로 쏠린다. 제사보다 젯밥이다. 절간 뒤편 산자락에는 제멋대로 뿌리내린 벚나무가 하나둘씩 꽃을 피우고, 나뭇가지마다 초록 새순이 움트고 있어 사방에 봄기운이 가득하다.
잘록한 허리에 무슬목과 해양수산과학관
용월사에서 조금 더 내려가면 끊어질 듯 잘록한 허리에 무슬목해수욕장이 있다. 여수는 해안선 길이에 비하면 의외로 이름난 해수욕장이 없다.
무슬목 역시 모래사장이 아닌 굵은 자갈로 뒤덮인 몽돌해변이다. 만질만질한 돌멩이를 층층이 쌓은 작은 돌탑이 해변을 덮고 있다. 추억처럼 쌓인 돌탑 뒤로 혈도, 죽도라 이름 붙인 두 개의 작은 무인도가 아련하게 걸린다.
해변을 감싼 솔숲은 조각공원으로 꾸며져 있는데, 화려한 색상의 갑옷을 두른 장군상이 눈길을 잡는다. 무슬목은 무술목으로도 불린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왜군을 섬멸한 해가 무술년(戊戌年)이어서 그 전적을 기리고자 무술목이라 부르게 됐다는 설이 있다. 이순신은 그해 바다 건너 남해의 노량 앞바다에서 왜병과 마지막 해전을 치르고 순직했다.
돌산도 잘록한 허리 부분에 위치한 무슬목 해변에 관광객이 쌓은 돌탑이 널려 있다.
돌산읍 무슬목해변에 이순신 장군을 형상화한 갑옷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아이와 함께하는 여행이라면 해변과 붙어 있는 전라남도해양수산과학관에 꼭 들르길 권한다. 입장료 3,000원(청소년 2,000원)에 온갖 물고기를 가까이서 생생하게 볼 수 있다. 로비로 들어서면 원통형 수조에 다양한 해수 관상어가 관람객을 맞이하고, 인공연못 수조에는 커다란 잉어가 헤엄친다.
전라남도해양수산과학관 볼록 수조에 쏨뱅이가 헤엄치고 있다.
돌산읍 해양수산과학관에 다양한 바다 물고기가 헤엄치고 있다. 규모는 작지만 알찬 과학관이다.
돌산읍 해양수산과학관에 다양한 어패류 표본이 전시돼 있다.
로봇 물고기가 꼬리 치는 수조에도 화려한 색깔과 특이한 형태의 다양한 물고기가 함께 유영한다. 대수조에서는 능성어, 전갱이 등 10종 100여 마리의 움직임을 관찰할 수 있다. 쏨뱅이와 새우, 해마가 헤엄치는 볼록 수조는 실제 바닷속 같은 착시를 일으킨다.
작은 상어와 살아 있는 산호도 관찰할 수 있다. 대형 아쿠아리움에 비하면 소박한 규모지만, 아주 가까이서 친근하게 바다 어류를 만날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2층 전시실에는 바다에 사는 온갖 물고기와 어패류 표본을 전시하고 있다. 해양생물과 환경에 관심 있는 사람이면 가성비가 뛰어난 과학관이다.
아는 사람만 아는, 큰끝등대와 승월마을 벚꽃
무슬목해변에서 섬 남쪽으로 국도와 해안도로가 갈라진다. 빨리 가려면 국도가 편리하지만, 경관은 당연히 해안도로가 빼어나다. 계동항, 두문포, 죽포항 등 바닷가 작은 포구를 연결한 길이다.
구불구불한 해안 언덕을 넘어 계동마을에 닿으면 공원으로 꾸민 아담한 방풍림이 나타나고 그 앞으로 또 고만한 포구가 형성돼 있다. 정감 있는 갯마을이다.
계동마을에서 해안도로는 다시 낮은 언덕으로 이어지는데, 크게 휘어진 고갯마루 도로변에 대여섯 대 차를 댈 수 있는 공간이 있다. 바로 여수의 숨겨진 명소, 큰끝등대 입구다.
소나무와 키가 크지 않은 난대림이 터널을 이룬 오솔길을 따라 250m만 내려가면 바닷가 암반 위에 하얀 등대 하나가 세워져 있다.
해안도로에서 큰끝등대로 내려가는 길에 난대림이 터널을 이루고 있다.
돌산읍 큰끝등대는 바다, 하늘, 등대의 단순미가 돋보이는 곳이다.
푸른 바다와 하늘만 보이는 큰끝등대에서 여행객이 가족사진을 찍고 있다.
여행객이 큰끝등대 해안절벽을 배경으로 가족사진을 찍고 있다.
등대 뒤는 햇살이 부서지는 푸른 바다뿐이다. 관리시설이나 관리원도 없고 여행객을 위한 편의시설도 전무한, 오로지 푸른 바다와 넓은 하늘, 하얀 등대만 존재하는 곳이다.
그 단순미가 눈 밝은 이들에게 발각돼 이따금씩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등장하지만, 아직까지 찾는 사람이 많지 않다. 여수에서도 아는 사람만 아는 소위 ‘인스타 명소’다.
위치로 보아 남해와 여수 사이 바다를 오가는 고깃배와 화물선의 길잡이 역할을 하는 중요한 등대인데 제원이라든가 누가 언제 세웠는지 등에 대한 안내문 하나 없다.
행정 주소는 돌산읍 평사리 산 1-1번지. ‘큰끝’이 어디에서 비롯된 명칭인지도 불분명한데 등대 바로 옆에 서면 그 의미를 조금은 짐작할 수 있다.
바닷가 거친 암반 위에 세워진 큰끝등대. 여수의 숨겨진 '인스타 명소'로 차츰 알려지고 있다.
큰끝등대 주변에 바다로 흘러내리듯 제법 넓은 암반이 펼쳐져 있다. 아무것도 없어서 편하게 마음을 비울 수 있는 곳이다
큰끝등대의 아담한 몽돌해변. 파도에 씻기는 돌이 구르는 소리가 예술이다.
등대 주변에 벌집처럼 구멍이 숭숭 뚫린 울퉁불퉁한 암석이 제법 넓게 펼쳐져 있다. 살짝 붉은빛을 띠고 바다로 흘러내린 암석에 끊임없이 파도가 부서진다. 등대와 마주 보는 수직 절벽 사이에는 작은 몽돌해변이 형성돼 있다.
밀려든 물살이 빠져나갈 때마다 ‘또르륵~ 또르륵~’ 돌 구르는 소리가 예술이다. 바람 소리, 파도 소리까지 더하면 멋진 자연의 화음이다. 자연의 소리 외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어서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힘들고 지친 마음을 부려놓을 수 있는 곳이다.
인근 승월마을 역시 여수 사람만 아는 숨겨진 벚꽃 명소다. 인근 마을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수해를 예방하기 위해 만든 승월저수지 주변에 심은 벚나무가 지난 금요일 막 개화를 시작해 이번 주 절정의 화사함을 뽐낼 것으로 예상된다.
저수지를 완공한 것이 2005년이었으니 나무는 그리 크지 않은데, 마을로 들어서는 길목에 터널을 이루고 있어 소담스럽고 산뜻하다. 벚나무 아래에는 개나리가 피어 있어 초록 들판과 함께 봄 빛깔이 제대로 어우러졌다. 돌산도 봄나들이 길에 꼭 들러야 할 곳이다.
돌산읍 승월마을은 여수의 벚꽃 명소다. 규모는 작지만 시골 풍경과 어우러져 정겹고 단아하다.
지난달 29일 승월마을 벚꽃 풍경. 이번 주는 화사하게 만개한 벚꽃을 즐길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승월마을은 가파르지 않은 산자락에 계단식 논밭이 제법 넉넉한 평야를 이루고 있는데, 돌산에서도 질 좋은 갓을 생산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따뜻한 해양성 기후와 풍부한 유기질 토양에서 자라는 돌산갓은 예부터 맛과 향기가 독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승월마을 아래 방죽포해수욕장도 규모는 작지만 예쁜 해변이다. 여수에서는 드물게 부드러운 모래사장이 아담하게 휘어져 있고, 200년 된 솔숲이 아늑하게 감싸고 있다.
방죽포에서 향일암까지는 다시 구불구불한 해안도로로 언덕을 넘는다. 대율마을과 소율마을 인근 언덕배기에 잠시 주차할 공간이 있는데, 차를 세우는 곳이 바다 전망대나 마찬가지다. 소율마을에서 언덕을 넘으면 그 유명한 향일암이다.
암자는 금빛 자라 형상이라는 금오산(金鰲山)이 완만하게 흘러내리다가 거의 수직으로 곤두박질치는 절벽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거칠 것 없이 펼쳐지는 남해 바다 수평선에서 말갛게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는 작은 절이다.
항아리처럼 둥글게 물이 파고든 돌산읍 향일암 포구. 향일암은 마을 뒤편 깎아지른 산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향일암 가는 길의 해탈문. 거대한 바위 사이로 난 자연 통로다.
갓김치 판매장과 식당이 즐비한 마을에서 암자까지 거리는 600m 남짓한데 경사가 가파르다. 쉬엄쉬엄 걸으면 20분은 걸린다. 탐방로는 여느 절간의 일주문 대신 거대한 바위 사이로 난 굴(해탈문)을 통과한다.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기암괴석, 바위틈에 자라는 작은 들풀을 보는 것도 즐거움이다.
등산에 자신이 없다면 굳이 향일암까지 가지 않아도 빛깔 고운 바다 풍광을 즐길 수 있다. 향일암주차장(임포주차장)에서 암자 입구까지 약 800m 구간에 차도와 나란히 생태탐방로가 조성돼 있다. 쉼터에서 내려다보면 커다란 항아리처럼 둥그런 포구에 작은 어선들이 그림처럼 떠 있다.